entrance and exit
삶에는 많은 좋은 가르침이 있음을 성장하며 알게 됩니다. 사람의 존재가 유사하기에 비슷함도 있으며, 때로는 독특하거나 특출한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피조물인 생명체인 인간으로서의 좋은 가르침과 방향을 제시하는데 스스로 터득한 것이어도, 그 저변의 역사성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먼저 살아간 삶에의 영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 가운데 좋은 교훈이 되는 모습의 예는 많이 있을 것입니다.
입구와 출구는 단조롭지만 제법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있으며, 삶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존재하지 않은 곳을 발견하기 힘듭니다.
지은바 된 생명체인 사람도 입구와 출구의 역할을 하는 곳, 대표적으로 입과 배설기관을 지니며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 역할에 대하여는 유아, 어린 아이 정도를 예외로 하고는 잘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필수적이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사람이 이룬 도구 등에는 예외가 있을 수 있어도, 생명체인 사람으로서는 보편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균형이라는 중요한 원리에 대하여 여러 조절 작용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 일련의 과정의 복잡함 만큼이나 그 모습과 연관된 수 많은 일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의식주와 인체 관련 여러 일들과 이로부터 생겨난 모습들이 삶을 이루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전의 몇 차례 다루었던 지구 관련 얘기 소재가 학문적으로 지구 공학, 과학이라는 분야로 정립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지구의 환경 관련 부분도 이러한 학문과 연관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심은 아무래도 직접피해가 있고,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좀 더 잘 알게 되는 환경에 놓이게 되다 보니,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 밖에 없는, 그런 소식을 거부하기란 참으로 힘든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집 주변에 공장이 드문 거주지임에도, 책과 매체를 통해 가끔 접하던 공장의 굴뚝으로 나오는 연기와 이에 대한 관련 매체를 통해서 보게 되는 내용에 대해, 그간 그렇게 관심이 가지질 않음이 일반인의 정서일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럼에도 근래의 그와 같은 높은 오염도의 경험으로 인해, 결국 사람은 자신에게 어떤 구체적인 피해가 올 때에야 이를 인식하고 어쩌면 좋은가 하며 관심을 갖는 이기적, 개인적 모습을 지님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여하튼 그런 피해, 경고의 등장은 결국 무언가를 돌아보고 점검을 하게끔 자극하는 적절한 모습에 한편으로는 다행입니다. 때로는 이는 기술 발전의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더 낳은 과학 기술에 이르게 하는 모습이 있기에 그런 모습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좋은 가르침과도 같이 대체로 예방이 최선인데, 시작 단계의 작은 발견에의 대응은 적절하며 괜찮은데, 이미 심각하여 알게 된 모습에 대해 치료 불가에의 결론은 얘기 소재가 되기 힘듦에도, 그에 대해 치료적 접근이 유효하여 완치에 이르게 된다면 매우 유명세를 탈 수 있음을 세상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지구 환경의 예방의 최선의 모습은 뒤로하고, 시작 단계의 조처도 넘은 것 같은 이 세대의 문제의 해결은 결국 유명세를 타게 될 어떤 조치의 등장과 그 해결이 공인되어 확인될 즈음에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이 되지 않겠는가 가늠해 봅니다. 향후 십 수년, 수십 년 후에 전개될 그런 공해가 극미한 원료 사용의 시대에 도달하면 가능한 얘기 같습니다. 그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주를 하던지, 형편이 안되면 폐를 튼튼히 하는 방법론을 찾던지, 여하튼 의료계는 호재임에는 분명합니다. 의료관련 주가의 수준이 높게 유지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출구가 없으면 안되겠는가 라는 생각을 해 본다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입구가 없어야 한다는 데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출구를 막으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해 봤는데,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완전 소화라는 개념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글쎄요 너무 복잡한 문제라서, 그것 보다는 출구를 좀 잘 만들어 보는 관점을 가지며 다루어 보겠습니다. 물론, 소화 기관과도 같은 그 중간 처리 부분을 잘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만 이는 다루는 조건이 너무나 방대하여 관련 전문가분의 역할이라고 생각해 보면서, 일부나마 출구 부분을 얘기하며 다루어 봅니다.
어떤 원료를 사용해 무언가를 만들어 낸 후에 그 배출물이 작을수록 그 원료를 잘 사용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님에도, 배출물이 좀 많아도, 이 또한 재 사용하여 그로부터의 배출물이 더 줄어든다면 잘 사용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배출물이 작게되어 기술이 좋아진 것으로 여길 수 있음에도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오히려 생태계에 해가 증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예 좀 어설픈 배출물이거나 완전에 가까운 처리거나의 중간의 모습으로 배출된 경우에 그것이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이죠. 과도기를 잘 넘겨야 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과도기를 어떻게 통과하는가에 따라 그 여파가 다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화가 전반적으로 잘 되었다면 배출량도 적고, 방구와 그 냄새도 적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세상에 그와 같은 비효율의 증거는 그 필요가 어딘가에 있지 않겠는가 그러기에 그런 비효율, 과도한 모습이 등장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의문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는 선 순환을 이루기에 좀 부적절한 부분이 있음이 아닌가라고 생각해 보게도 합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산을 줄이는 것, 삶을 검약하게 살게 하는 것이 최고의 해결책이라고 말이죠. 틀리진 않아도 옳다고도 할 수는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극단적인 비참함의 상태, 극빈의 상태가 아닌, 알맞은 삶을 보내는데 옷 몇 벌과 신발 몇 켤레로 수 십 년을 지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내는 환경을 이루면 그렇게 오염 문제로 고통 받지 않으며 대체로 청정한 지구 환경을 유지하며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논리가 전혀 근거 없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실제 사회의 삶에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 하려면 피조물인 사람의 기본 기관 형성, 능력 자체에 그런 가능성이 심겨져 있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에 있습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인간은 다양하며 수 많은 능력을 드러내는 여러 가능성을 그 기본 인체에 심겨져 놓으심이 창조주의 원리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접근은 타당성과 좀 거리가 있다고 보입니다.
성경의 예수께서도 그분의 마지막을 일반인들과 같이 죽음과 흙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이시질 않으시고, 부활과 후에 승천을 이루심을 통해, 존재하는 세상에의 놀라운 일의 가능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인간이 이루어 놓은 많은 모습은 그러한 탁월한 능력의 발굴이며 그 결과의 모습의 반증임을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다만, 입구와 소화 기관과 출구에 불균형이 생기게 되었다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현안을 경험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출구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투자를 해야 함을 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간의 출구에의 관심이 적절하지 못한 부분으로 인해, 그 물건의 가격이 저렴하였던 것에 오류가 있음을 감안하는 세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그 피해가 고스란히 점차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 과장한다면, 어느 날에는 앞이 보이질 않아 어딘가 놀러 갈 수 없는 모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문제 의식과 이의 제기가 좀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며 다루어봅니다.
십 수년, 몇 십 년 후면 없어질 것이니 그렇게 신경쓰지 마세요 라고 한다면, 성경의 기록과도 같이, …너희는 잠시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야4:14) 걱정하지 말라 (마 6장 일부) 하심으로 여겨야 한다는 견해를 제안한다면, 이는 그다지 적절하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인문학적으로는 어느 정도 타당한 부분이 있음과 함께, 삶의 개선을 실제적으로 이루려는 인문, 과학적 접근으로서는 그것은 일을 무시하는 것이며 방치이자 방관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다른 문구가 좀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감추어진 달란트의 비유와 같이 말이죠. 자신의 역량을 잘 발견하지 못한 결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해결에 도움이 되는 여러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 소재가 있음에도, 물이 어떠한가요. 불 또한 가능합니다만, 오히려 오염물질의 배출을 변형하여 증가하게 하기도 합니다. 태양의 온도와도 같은 뜨거운 조건의 적은 에너지로 지속 가능하다면, 그 불과 열로 오염물질을 태워버리면 그 결과물이 거의 남지 않을 것 같기는 한데, 오늘날 개발 중인, 이 또한 언제 이루어질 것인지, 가능한 것인 것인지 가늠하기는 아직 힘이 듭니다. 물도 그 물의 부족의 경우가 가능하므로 신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미생물을 키워 오염 물질을 먹게 하고 그 출구로 나온 것을 사용하려는 시도의 경우, 그로부터 나오는 자연의 녹조, 적조, 휘발성 물질 등의 현상과도 같이 재순환이 가능함에도 이 처리 능력과 그 규모가 커질 것이므로 잘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바다의 소금물을 사용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간이 약인가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인가요. 누군가는 인문학적 해결책인 인류의 지혜를 소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갈등이 심한 가족이 참다 못해 지혜자에게 고통을 호소하자, 그 집에 가축을 몇 마리 들여놓고 몇 일을 지내보라고 하고 이를 경험한 이후 그 혼잡함에 재차 불평하자, 이번에는 더 많은 가축들을 들여놓고 몇 일을 지내보라고 하자, 이를 경험한 이후 더 심한 불평에 이르자, 이번에는 그 동물을 모두 내어 놓고 지내보라고 하자, 결국에는 삶에 불평이 줄었다고 하는 어느 얘기를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는 주의해서 적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은 대체로 성경의 일부 방법론 같음에도, 구약의 여러 역사적 예와 같이 하나님을 떠난 그 모습의 결국에 비참한 노예 생활로 이어지는 모습을 주로 경험한 유대인의 전승의 기록과도 같음의 이유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에 미루어 이러한 제안은 어떠할까요.
더 많은 산업을 발전하게 하여, 오염 물질을 더 많이 배출해 보라, 몇 년 후가 되면 그 불평이 더 심할 것입니다. 그 때, 그러면 좀 더 많은 산업의 발전을 이루어 보라, 더 많은 오염 물질의 고통의 기간을 경험할 것입니다. 불평이 거의 극에 달할 즈음, 이제는 산업의 발전 많이 줄여 보라.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평이 사라지지 않겠는지.
농담입니다만, 오늘날 인류의 모습이 이 와중에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틀리지는 않는 것 같은 모습니다. 그러므로 몇 십 년을 참아내다 보면, 산업의 중지가 아닌, 새로운 기술이 나와서 오염의 배출이 확연히 줄게 될 그 즈음의 도래에 기대를 거는 삶도 좋지 않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고흐가 생각나는, 위의 사진은 유럽서 제공하는 Particulate 미세먼지 2.5PM 의 분포를 나타내는 자료로, 붉은 부분이 미세먼지로 대체로 평시 수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북남미, 유럽 일부, 러시아, 중국 서부 등이 괜찮은 지역이며, 다른 지역은 항상 미세 먼지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알려 줍니다. earth.nullschool.net
오늘날에는 사람이 증가하는 만큼 학문이 다양해 지고 있기에, 여러 고충을 다루는 학문이 유효한 모습입니다. 앞서의 그 예화를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대체로, 원인을 치료하는 것이기 보다는 원인을 잠재우는 것인 것 같습니다. 상대적 경험에 근간한 이론에 유효한 것이죠. 한편으로는, 원인을 잠재움이 최선의 치료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최선의 치료라기 보다는 당시에 합당한 치료이며, 오늘날 과학 의학 등의 학문이 발달된 세대에는 그것만이 유효한 것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좀 더 돈을 소비하여 그 치료를 이루어 내세요 라는 광고가 효과를 보는 세대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치료는 결국 아무리 비싼 비용을 들여도 치료할 수 없음을 인생은 경험하며, 성경을 통해 증거하신 복음을 통해서만이 치료 가능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산업이 발전하고 그에 따른 부작용이 증가하면서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고 그 잘못의 해결이 등장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더 좋은 환경에 이르는 모습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과정에의 고통의 호소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만 자본주의의 논란거리가 되는 단점을 넘어서는 부정할 수 없는 장점이기도 하기에, 수 많은 이들의 불평이 자극으로 이어져 오히려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해 주는 모습에 이르게 되는, 결국에는 더 발전되고 그에 따른 문제가 복합적으로 발생, 해결해 나가는 오늘날과도 같은 세상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에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5:16~18) 고 주심의 뜻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실제하는 인간의 삶에 일괄적인 적용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최선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무언가를 선택할 자유와 의지를 바탕으로 제어가 가능한 존재입니다. 물론, 중독과도 같은 모습에 노출되어 있다는 평가에 이르면, 스스로 헤어나오기는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 그 잘못된 부분을 고침을 받아야만 지속 가능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입구와 소화와 배출구의 알맞은 조화를 이루게 지음을 받았음에도, 삶 가운데 이를 효과적으로 유지 못하게 되었다면 자포자기 보다는 치료를 받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러므로, 지구 공학, 과학 등의 관점으로 지구 공동체는 진단과 처방을 받아 그를 행하고 있는 모습을 좀 더 잘 이루어야 할 때라고 보입니다. 그런 과정을 감수하고 통과하고 알맞은 치료를 통과한 이후에, 약의 지속적 복용 여부를 처방 받고 행하므로, 지속 가능한 모습에 이를 수 있습니다.
둔화된 감각을 살리고, 그 과정에 들어가야 할 시점을 놓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갈등에의 불만과 더 복잡한 환경을 경험하였다면 이제는 복잡함을 내어 보내고, 알맞은 삶에 감사하는 삶으로의 진행에 들어서는 것은 어떠한가요.
언제부터인가 공장 등의 자국으로의 회귀 이면에는 오염 배출의 일부를 자국이 책임을 지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고통 분담이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전 지구적으로 그렇게 여행하기 좋은 곳은 줄어드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향후 얼마간은 말이죠. 그렇다고 이를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내규분쟁, 높은 임금 등으로 공장의 이전해야 하는 모습에도 해당 지역의 좋은 환경을 이루어 건강에 이바지 하는 부분과 함께 저개발국을 잘살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아이러니 입니다.
위의 공장 굴뚝 모습과도 같이, 직선 구간의 짧은 소화 배출구의 통과 구간을 길게 늘려 여러 여과 장치를 거친다면, 오염도를 많이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간은 좀 덜 소비하는 모습은 어떠한가 생각해 봅니다. 휴가일 수를 더 늘리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간 산업화를 일군 많은 기술 관련 종사자 분들의 놀라운 업적으로 오늘날 인류는 일부 가난한 곳이 있음에도 대체로 풍요롭게 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가난한 곳도 점차 변화되어 가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 즈음 산업의 부작용인 오염, 미세먼지 등으로 인해 고통을 받기도 하는 가운데, 그간의 역량을 좀 더 잘 사용하여 배출구를 개선하고 오염 배출을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볼 수 있겠습니다. 언제 가능할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언젠가는 도래할 무공해 저공해 연료 사용의 시기 도래까지의 과정을 지나면서 연료의 소화 과정과 배출구 개선에, 그간의 놀라운 기술력을 이룬 산업의 일꾼들이 나선다면 충분히 해결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Feb 2019